영원; 할 수 없는
프리파라 시쿄인 히비키 드림 · 뮤지컬 레베카
저택의 두꺼운 벽은 삼나무로 세운 것이다. 해풍을 맞으면서도 몇백 년을 버텼다. 이 저택의 주인은 그동안 계속 바뀌었다. 그들은 벽에 검은 칠을 했고 또 그 위로 검은 칠을 해댔다. 긴 시간, 안료는 벗겨졌으나 벽은 무너지지 않았다. 모서리마다 정교하게 깎은 나뭇잎 모양이 보인다. 나기가 이 방에 처음 들어섰을 때부터 지금까지 여전한 것. 깎이거나 부서지지 않았다. 나기는 그 모양을 보지 않고도 외워 그릴 수 있다.
큰 창문은 테라스로 이어진다. 그 너머로 바닷바람이 불어온다. 소금기 섞인 내음. 꽃을 키우기엔 나쁜 환경이다. 나기는 창문을 닫고 방 안쪽으로 몸을 돌린다. 한가운데, 나무 탁자 위로 화분이 하나 있다. 푸른 난초다. 나기는 저 난초가 언제부터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나기가 여행을 다녀와도 난초는 거기 있었다. 멀리 떠났다가 돌아오더라도 난초는 계속 있었다. 메말라 누런 잎을 드러낸 난초에 물을 주는 게 귀가 후의 일과였다. 죽었으려나 생각하면서도. 그러면 난초는 며칠 뒤엔 죽은 잎 사이로 새로운 잎을 내곤 했다. 거짓처럼. 그러나 죽지 않고 살았다는 게, 그게 진실임을 나기는 알았다. 뿌리가 여전히 살아 있었다는 걸, 그래서 새로운 잎이 자랐다는 걸 나기는 알았다.
어쩌면 저 난초는 이 방만큼이나 오래되었을지도 모른다. 방의 주인이 바뀌어도 난초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계속 저 탁자 위에 놓여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기가 더는 이 저택에 남지 않게 되더라도, 혹은 저택이 비어 버려도, 난초는 마른 잎만을 내보이며 누군가 제게 물을 줄 순간을 기다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때가 오면 자신이 살아 있었음을 알릴지도.
죽음의 낫으로 벨 수 없는 생명이 있다.
나기가 그걸 안다.
그러므로 히비키를 처음 본 날 나기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어깨에 닿지 않는 길이의 짧은 은색 머리카락, 선명한 녹색 눈. 옷은 대체로 잿빛이었고 재질도 눈에 띄지 않았다. 따로 맞추지 않은 기성품으로 보였다. 그러나 히비키는 똑바로 걸어와 악수를 청했다. 자신이 두른 껍질에 개의치 않는 태도였다. 히비키가 내민 손을 내버려 둔 채, 나기는 웃으며 말했다.
“방으로 안내해도 되겠니.”
친애를 숨길 생각도 없는 부드러운 어조로. 히비키는 손을 매끄럽게 떨궜다. 마치 원래 그렇게 움직이려고 했던 사람 같았다. 악수를 거절당한 일 따위는 없었다는 듯이.
처음 ‘그’와 만났을 때 그는 악수를 청하지 않았다. 그는 저택의 어린 주인이었고, 나기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새삼스레 인사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커틀러리와 편지지, 조명을 정했다. 계절마다 커튼과 카펫을 바꾸고 침구를 새로 사고 이전에 쓰던 걸 버렸다. 저택의 모든 것은 그의 소유였다. 저택에 그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은 없었다.
나기조차도.
나기는 그의 옆에서 훌륭하게 일을 수행했다. 밤엔 그의 곁을 지켰다. 낮엔 그의 일을 했다. 그와 나기는 많은 걸 나누었으나 그중 제일은 영원이었다. 나기는 그와 이 저택이 영원할 것으로 생각했다.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건 그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언젠가 그가 바다로 사라졌을 때, 나기는 다만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가, 정말 돌아온 날까지. 새로운 ‘그’는 히비키라는 이름으로, 히비키라는 존재로 저택에 들어섰다. 한눈에, 그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똑같은 모습. 익숙한 은발, 익숙한 녹색 눈.
돌아왔구나.
죽지 않고.
그의 방은 그대로였다. 그가 나갔던 순간부터 히비키가 들어온 순간까지의 시간이 없었던 것처럼, 완전히 같은 모습을 하고. 나기는 히비키를 그가 쓰던 방으로 안내했다. 한 손으로 문을 열고 나기가 들어서길 기다렸다. 방을 보고도 히비키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안내에 감사 인사를 건넸을 뿐이었다. 나기는 답했다.
“그렇지 않아.”
“무엇이 말이지?”
“이런 걸로 감사를 입에 담으면 안 되지, 이곳의 주인인데.”
그가 그랬던 것처럼.
히비키는 방 열쇠를 건네받으며 말끔하게 웃었다. 예의 바른 거절이었다. 방으로 들어가는 히비키를 보며, 나기는 그 거절을 생각했다. 나기는 오래도록, 거절을 생각했다.
오늘은 저택의 새로운 주인을 위한 파티가 있을 예정이다. 나기는 난초에 물을 주고 방에서 벗어난다. 파티를 위해선 준비할 게 많다. 게다가 히비키는 ‘그’와는 다르게 일을 세심하게 챙기지 않는 편이었다. 일 처리에 지적할 부분은 없었으나 어떤 조명을 켜고 어떤 조명을 꺼야 할지는 말하지 않았고, 손님을 분류해두지도 않았다. 나기는 넌지시 히비키에게 물었다. 어떤 손님을 더 중요하게 대해야 하는지. 그러나 히비키는 답하지 않았다. 나기는 ‘그’의 기준으로 판단하기로 했다.
그의 기준으로 손님의 자리를 배치한다. 의자를 고르고, 작은 흠이라도 있는지 점검한다. 사용할 접시를 다시 본다. 주방의 고용인에게 요리의 상세를 듣는다. 애피타이저와 주요리, 식전주와 디저트 와인. 그 뒤엔 다시 응접실로 돌아와 누굴 어떤 응접실에 앉혀야 할지 고민한다.
그리고 나기는, 마지막으로 히비키의 방으로 향한다. 히비키는 목욕을 마치고 옷을 고르는 중이다. 나기가 준비한 옷이 침대 위에 늘어져 있고, 히비키는 옷장 앞에 서서 방으로 들어오는 나기에게 시선을 던진다.
“들어오라고 한 적 없는데.”
“준비를 도울 사람이 필요할 테니까.”
나기는 히비키가 침대에 둔 옷을 집어 들어 히비키에게로 향한다. 히비키는 감색 코트를 입으려던 참이다. 나기가 들고 있는 옷을 보곤 변명으로 들리지 않을 선에서 답한다.
“오늘은 이걸로 할 거라서.”
“정말이니?”
나기는 은실로 자수가 된 흰옷과 히비키의 코트에 한 번씩 시선을 둔다. 그는 저택으로 몇 번이고 재단사를 불러서 옷을 지었기에, 나기는 본의 아니게 재봉이나 재질에 관해 지식을 얻었다. 그러니 지금 히비키의 옷이 나기가 들고 있는 것에 비해 얼마나 질이 떨어지는지 잠깐 보는 정도로도 알아차린다. 나기가 아는 걸 히비키의 손님 모두가 모를 리 없다. 히비키의 것은 분명히 고급품이나 책잡히지 않을 정도는 아니다. 나기는 저택의 주인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을 만들고 싶지 않다. 이 저택의 주인이, 질 떨어지는 옷을 입고 파티에 나왔다고 말하게 둘 순 없다. 나기는 흰 코트를 들어 히비키에게 대 보고, 히비키는 한 걸음 물러난다. 반사적으로.
“권하는 대로 했으면 하는데.”
“나기.”
히비키는 마른세수하곤 곤란하다는 티를 낸다.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단 걸 숨길 기색도 없다. 나기의 손에 있던 옷을 뺏어 소파로 던진다. 그러나 감정적으로 격하진 않다.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연다.
“파티에 다른 사람의 옷을 입고 가고 싶지 않아.”
“다른 사람이라니? 저택의 주인이란 건 같은걸.”
“난 ‘그’가 아니야.”
이 저택을 사들일 때, 전 주인에 관해 들었노라고 히비키는 말한다. 놀라울 정도로 닮은 사람이었다고. 그러나 그는 바다로 나가 죽었다. 다신 돌아오지 않았다.
“넌 내 친구를 닮았어.”
오래전에 사귄 친구. 영원을 약속한 친구를. 그러나 그 친구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 저택에서 나기를 보았을 때 히비키는 친구를 떠올렸으나, 같은 사람이 아님을 알았다. 같은 사람이 되길 바라지도 않았다.
“이미 죽은 친구를.”
나기는 빈손을 내린다. 창문이 열려 있다. 그는 한 번도 이 방의 창문을 연 채로 두지 않았는데. 창 너머로 바다 냄새가 밀려든다. 바람을 맞으며, 히비키는 나기를 쳐다본다. 그건 나기가 모르는 모습이라서. 나기는 고개를 젓는다. 그러나 히비키는 그곳에 계속 서 있다.
문득, 이 방을 전혀 모르겠다고, 나기는 생각한다. 낯선 장소에 갑자기 던져진 것처럼. 삼나무로 만든 벽도 몇 번이고 새로 칠한 벽도 바다 옆에 선 이 저택도, 전부 모르는 것이다. 바닥에 깔린 카펫도 직접 바꾼 커튼도, 모르는 것들뿐이다.
창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린다. 손님이 차차 도착한다. 히비키가 손님을 맞이하러 방을 나간 뒤로도, 나기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갑자기, 실이 끊어진 것처럼 뛴다. 복도를 가로지른다. 다급하게 제 방으로 들어가 탁자를 본다. 검은 탁자 위엔 난초가 있다.
어쩌면 이미 죽은 난초가.